1장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성립과 활동


Ⅲ편 1910년대 전반기 자바이깔 지역 재러한인의 민족운동

1장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성립과 활동

1910년대 러시아지역의 한인독립운동은 크게 두지역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 지역은 블라지보스또크(海蔘威), 하바로브스크 등을 포함하는 沿黑龍州 지역이며, 또 한 지역은 치따(ܧܸ݂ܰ), 이르꾸쯔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자바이칼(ܗܱܹܻܰܰܺܰ݌ܸܹ݁ܺ ܚܹ݀ܰ 後貝加爾州) 지역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지역은 勸業會가 활동한 연흑룡주일뿐, 자바이깔지역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하여는 전혀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그곳에서 조직된 이르꾸쯔크파 공산당만이 널리 알려져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민족운동사적 시각에서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도 혁명이전 시기 이 지역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구한말부터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자바이깔지역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미주에 본부를 두고 있던 大韓人國民會의 시베리아지방총회(이하 시베리아총회로 약함)인 것이다. 이 단체는 1911년에 李剛, 鄭在寬 등에 의하여 치따에서 조직되어 1915년 러시아에 의하여 단체가 해산당할 때까지 5년동안 자바이깔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4년에는 옴스크, 馱스크, 이르꾸쯔크 등지에 21개 지방회를 관할하고 있을 정도로 넒은 조직망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1910년대 전반기에는 권업회와 함께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이 단체에 대하여 거의 주목하지 못하였다.

) 다만 김도훈, ゛공립협회(1905-1909)의 민족운동연구ゝ,セ한국민족운동사연구ソ4, 1989

: 윤병석, ゛미주 한인사회의 성립과 민족운동ゝ, セ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ソ, 일조각, 1990: 최기영, ゛미주교포의 반일언론: セ공립신보ソ·セ신한민보ソ의 간행ゝ, セ대한제국시기 신문연구ソ, 일조각, 1991 등에서 간단히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시베리아총회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시베리아총회의 성립 배경으로서 구한말부터 1910년대 초에 걸쳐 러시아 지역에 조직되었던 미주의 共立協會와 國民會의 遠東支部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들 단체들이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시베리아총회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시베리아총회의 성립과 활동에 대하여 밝히고자 한다. 이 중 활동 부분은 시베리아 대의원총회의 개최, 교육및 실업활동, 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의 마련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끝으로 시베리아총회의 재정에 대하여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 부분은 1913·1914년의 예산안과 수지대조표를 중심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국내, 중국본토, 만주,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재정을 파악할 수 있는 문서가 없었던 점과 관련하여 볼 때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하여 1910년대 러시아지역 한인 민족운동의 전체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1.재러한인과 미주한인세력과의 연계

1. 공립협회의 遠東支會 설치

1905년 4월 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安昌浩의 주도로 공립협회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항일운동과 同族相愛를 목표로 조직된 민족운동기관으로서

) 김원용, セ재미한인오십년사ソ, 1959, p. 88

1905년 11월 12일자로 共立新報를 창간, 교포사회에서의 애국심 고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 최기영, 앞의 논문, pp. 196-198

또한 1906년까지 미주 내 조직을 완비하고 1907년부터는 국내에까지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안창호, 이강, 林俊基 등이 1907년 1월 초순 미국 리버사이드에서 모임을 갖고 국내에 조직을 만들기 위해 동년 1월 8일 안창호를 국내에 파견하였다.

) 김도훈, 앞의 논문, pp. 14-17

뿐만 아니라 하와이와 러시아 지역에도 지회의 설립을 모색하여 1908년 2월 20일에 개최된 공립협회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하와이와 블라지보스또크에 공립협회의 조직을 확장할 것을 결의하고 그 임무를 총회장과 총무에게 위임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 공립신보 1908년 3월 11일 잡보

특히 이 중에서 블라지보스또크에 원동지회를 설치하고자 했던 것은 이 지역을 독립군 기지의 최적지로 생각하여 국내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면 호응할 해외기지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 김도훈, 앞의 논문, p. 30

한편 러시아 블라지보스또크에서도 일찍부터 공립협회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당시 미주의 공립협회는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조직한 단체였으므로 같은 입장에 있던 재러한인들도 이 단체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그러던 차에 공립신보가 러시아 지역에 배달됨으로써 재러동포들은 더욱 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7년 9월 24일에는 거류민장겸 啓東學校 감독 崔萬學, 거류민 부장 楊成春이 공립신보사에 격려편지를 보내는 한편 은화 60원을 보내고, 블라지보스또크 계동학교를 공립신문 지사로 인정해주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 공립신보 1907년 12월 20일 잡보 <감사 폡삼위 동포>, 공립신보 1907년 12월 27일 기함 <폡삼위 동포의 편지>

한편 블라지보스또크 거류민회에서 이처럼 공립협회에 호감을 보이자 공립협회에서는 국내 서울에 가 新民會에 참여했던 이강을

) 주요한, セ속편 도산안창호ソ, 삼협문화사, 1954, p. 134

블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하였다.

) 이강, ゛桑港에서 海參威ゝ, セ東光ソ 26, 1931, p. 41

1908년 3월 24일 블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한 이강은

) 張志淵, ゛海港日記ゝ, 1908년 3월 24일조, セ張志淵全書ソ 8, 단국대학교부설 동양학연구소, 1986.

우선 공립신보에 지사 설치를 요청했던 거류민회 최만학과 양성춘 등을 만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공립신보의 지사인 계동학교를

) 공립신보 1907년 12월 20일 특별사고

근거지로 삼았을 것이며, 그들을 통하여 그곳의 정황 등에 대하여 파악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 가운데 최만학은 블라지보스또크의 거부인 崔鳳俊의 생질이자 그의 재산 관리인이었고, 1908년 2월부터 블라지보스또크에서 간행되고 있던 海朝新聞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다.

) 박환, ゛해조신문ゝ, セ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ソ, 일조각, 1991, p. 308, 한편 ゛해항일기ゝ, 1908년 4월 26일자에는 崔萬鶴을 사장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강은 최만학을 통하여 해조신문에서 일하게 되었을 것이다.

) 장지연, ゛해항일기ゝ, 1908년 3월 24일조

그런데 사실 해조신문사에서 일하는 것은 그가 내심 바라던 바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강은 공립신보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최기영, 앞의 논문, p. 208.

이강은 해조신문사에서 재러동포들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중 신문이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08년 5월 26일 폐간되자,

) 박환, 앞의 논문, p. 320

兪鎭律, 車錫甫, 文昌範 등 35명과 함께 신문을 다시 발행하고자 노력하였다.

) 공립신보 1908년 10월 21일 잡보

한편 이강은 해조신문이 폐간 된 이후에도 공립협회의 이념 전파에 노력하였고 그 결과 러시아 水靑 신영동에 거류하는 金基玉이 1908년 9월 25일자로 공립협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글을 공립신보사에 보내기에 이르렀다.

) 1908년 11월 18일 회보에 보면 이강이 1908년 9월 25일에 수청 지방회의 조직을 본회에 보고 하고 있다. 이로 짐작하건데도 역시 수청 신양동 지회의 설치에 이강이 큰 역활을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공립신문 1908년 10월 28일 회보 <海港同志의 寄函>에서 그는,

본인이 서편으로 미주를 향하여 백배사례하는 것은 유지한 친구의 전하는 말과 각 처 신문을 인하여 들은 즉 이친적 기분묘하고 적수공권으로 수만리 태평양을 건너 북미주에 려유하는 몇 되지 못하는 동포들이 주야가 바뀌이고 언어가 생소한 천지에서 한 몸을 자활하기가 난처할터인데 도리어 조국을 사랑하는 혈성으로 피와 땀을 흘리고 금전을 허비하여 단체를 조직하여 공영사를 대신하며 환란을 서로 구하며 허물을 서로 교정하며 학업을 서로 힘쓰며 신문을 발행하여 내외동포의 몽롱한 잠을 경성하니 감사함을 말지 아니하며 부끄러움이 또한 말지 아니하여 마음이 자연 감격하여 일비지력이라도 도울 정성으로 이에 귀회에 입참하기를 청원하오니 본인이 지식없음을 혐의 마시고 힘을 같이 하여 조국에 헌신하기를 교도하여 주시기를 바라오며(맞춤법 -필자)

)이 이후에 나오는 인용문은 필자가 맞춤법에 따라 고친 것임.

라고 하여 공립협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김기옥은 당시 신영동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인물이었던 바

) 공립신보 1908년 11월 11일 해삼위 교육진흥이라 하여 교주가 김기옥이라고 되어 있고, 교감 김교국, 교사 김석영, 박영갑이라고 되어 있다. 학생수는 약 40명 정도이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ぢ유지한 친구의 전하는 말っ, 즉 이강의 설득과 ぢ신문을 인하여 들은 즉っ, 즉 공립신보의 구독을 통하여 공립협회에 가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908년 9월 29일 김기옥 등이 중심이 되어 수청 신영동에 러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립협회의 지방회가 설립되었다.

) 공립신보 1908년 11월 18일 축하해삼위공립회

그것은 러시아 지역에 미주 공립협회의 지부가 최초로 조직되었다는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에 공립협회에서는 공립신보 1908년 11월 18일자 별보 <축하해삼위공립회>에서 그 설립을 축하하는 한편 다음과 같이 설립상황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음력 9월 초 5일에 아령 수청 신영동 신영학교내에서 유지인사 30여명이 회집하여 회를 조직할 때 발기인 김기옥씨가 좌중을 향하여 발론하기를 우리가 조국을 떠난지 3,4십년이 되였는데 조국에 대한 의무를 하나도 행한 것이 없고 나의 동포를 외국인과 같이 대우하여 단체의 공익을 깨닫지 못하였음으로 오늘날 우리의 조국 강토가 외국인의 식민지가 되고 우리의 동포 형제가 원수의 노예가 되며 심지어 조선의 백골까지 왜인의 광의 끝에 없어지는 비참한 화색을 당하였으니 이 때를 당하여도 오히려 조국을 돌아보지 아니할 지경이면 엇지 위로 상천이 두렵지 아니하며 아래로 세계 사람이 부끄럽지 아니하리오. 그런 고로 오늘날 우리가 모인 것은 (중략) 오호-동포여 미주에 있는 동포의 단체를 보시오. 만리절역에 무한한 고초를 당하는 중에도 단체를 성립하고 동종을 상보하여 국가 공익에 국궁진취하는 것을 보매 목석이 아니거든 누가 칭찬하고 감복지 아니하리오, 그런고로 본인의 의견에는 이곳에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미주에 있는 동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국민 단체를 확장하여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종족을 구원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가 될지니 본인과 의견이 서로 같으시거든 손을 드시오, 만좌제씨가 일시에 손을 들어 응답하다.

즉 김기옥은 이곳에 공립협회 지회를 조직하고, 미주에 있는 동포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 단체를 확장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 국민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립협회 수청 신영동지회가 조직되자 이어서 임원 선거가 있었는데, 회장 金錫永, 부회장 김기옥, 서기 朴永甲, 회계 박상준, 학무 김교국, 김병룡, 박근섭, 한경서, 사법 최흥섭, 경찰 고우천, 김석규, 응접원 김기옥, 한원서, 사찰 김기성, 박석빈 등이 선출되었다.

) 공립신보 1908년 11월 11일 회보

그리고 회원은 김석영, 김기옥, 박관성, 김석규, 박상준, 김교국, 최홍섭, 김기홍, 고우천, 한원서, 김병룡, 김병두, 박영갑, 박석빈, 김병진, 박근섭, 김성관, 한경서, 고문천, 김수원, 이홍익, 박원록, 이병섭, 김응순, 고순천, 한창걸, 김기성, 김남영, 최두칠, 김장석, 박상걸, 조지화, 김병상, 배득만, 김태국, 원사집, 김두영, 강석필 등이었다.

) 공립신보 1908년 11월 11일 회보

공립협회 수청 신영동 지회가 설립되자 부회장 김기옥은 6간 가옥 한 채를 지회에 기증하여 회관을 건설하도록 하였다.

) 공립신보 1908년 11월 18일 회보

아울러 이 시기에 블라지보스또크에 공립신보의 지사가 두곳에 더 설치되었다. 블라지보스또크 큰령 조지화의 집과 신영 김기옥의 집 등이 그곳이다.

) 공립신보 1908년 11월 18일 회보

두 곳에 공립신보 지사가 설치된 것은 수청 신영동 지회의 설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 같다. 큰령의 조지화는 수청 신영동 지회 회원이며, 신영동의 김기옥은 부회장인 것이다.

한편 블라지보스또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은 직접 미주의 공립협회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908년 11월 28일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장 허승원의 보고에 따르면 당일 특별회에 블라지보스또크에 거주하는 김명규, 조영태, 韓馨權, 류완무, 吳周赫 등 5명이 신입회원으로 가담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 공립신보 1908년 12월 2일 회보

또한 1909년 2월 11일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 李相卨, 박원백, 하춘식, 최구동, 尹逸炳, 이종한, 양성춘, 咸東哲, 서상구, 이종승 등이 신입회원으로 입회하였다고 한다.

) 공립신보 1909년 2월 17일 국민회보

그들의 가입은 아마도 블라지보스또크에 지회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직접 본회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한다.

러시아 지역에서 이처럼 공립협회의 조직이 활기를 띠는 가운데 金成武가 1908년 12월 13일 블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였다.

) 공립신보 1909년 2월 17일 잡보

그는 공립협회에서 파견한 블라지보스또크 사무대리인으로서

) 공립신보 1909년 2월 17일 잡보

, 블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자 이강과 만나 공립협회의 조직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09년 1월 7일에는 블라지보스또크항에 공립협회 지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 공립신보 1909년 2월 17일 국민회보

지회의 임원을 보면 회장 오주혁, 부회장 鄭淳萬, 서기 이홍기, 회계 尹能孝, 학무 한형권, 응접 양성춘, 태원선 등이었다. 그리고 회원으로는 李致權, 함동철, 서상구, 서성해, 奇山度, 이종승, 전원규, 김연상, 홍근표, 尹旭, 박근찬, 蔡成河, 우시화, 한진택, 전창식, 엄운섭, 류완무, 김종철, 김철훈, 조영태, 최구동, 이종환, 표흥식 등을 들 수 있다.

) 공립신보 1909년 2월 17일 국민회보

한편 공립협회에서는 블라지보스또크에 실업을 진흥하고자 1908년 10월 21일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발기하였다. 이 회사는 자본금 총액을 미화 2만불로 정하고 총8백주로 나누어 매주당 25불씩하고 자본 총액의 10분의 1이 되면 곧 개업하기로 하였다. 또한 본사를 블라지보스또크에 설립하기로 하고 미주, 하와이, 한국에 지점을 두기로 하였다.

) 공립신보 1908년 10월 21일 시사 아세아실업주식회사 취지서

그것은 블라지보스또크를 독립군 기지 건설의 최적지로 파악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한국, 미주 등지에서 식산흥업으로 재정을 마련 독립전쟁 수행시 재정적 지원을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세아실업(주)는 1909년 2월 공립협회가 해체되어 국민회로 발족한 후 泰東實業株式會社로 승계되어 활동하였다.

) 윤병석, 앞의 논문, p. 340.